위런궈(于仁国)
칭화대학교 물리학과 1996 학부생. MBA 2004 학번.
Magic bean VC(魔豆投资) 창립 파트너, 드림 캐슬(梦之城联) 공동 창업자.
창업자 간 링크시스템을 통해 아이디어의 시너지를 창출하다
‘Magic bean VC’는 "투자+인큐베이팅"의 사명에 따라, 문화산업, 스포츠, 관광레저, 교육 등 범문 화적 분야에서의 창업가를 지원한다. 창업 멘토링, 금융 자문, 산업체인 자원을 한데 모은 스타트업 전용 투자 + 인큐베이팅 플랫폼이다. ‘드림시티’는 중국의 국민 캐릭터 "알리(阿狸: 빨간 여우 캐릭터)"와 "뤄샤오헤이(罗小黑: 검은 고양이 캐릭터)" 제작사이다. '피촤이즈(皮揣子: 뚫어뻥 든 노란 고양이 캐릭터)', '아몬드 디어(杏仁儿: 연분홍 사슴 캐릭터)' 등 유명 오리지널 캐릭터 IP를 다수 보유하고 있다. 위런궈는 문화콘텐츠 분야의 우수 스타트업 및 개인 창작자 10여사를 발굴 및 육성하였으며 초기 투자의 조력 가로 활약했다. 투자 및 융자 협력, 스타트업 관리 운영, 스타트업 시스템 구축, 브랜드 저작권, 인수합병, 비즈니스 자원 관리 및 산업 연계 방면에 풍부한 경험을 보유하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중국의 캐릭터 IP 성공사례를 들자면 바로 "알리(阿狸)”이다. 괄목할 만한 성장으로 하나의 상징이 된 이 캐릭터는 "알리”의 대중화를 이끈 대부 위런궈를 문화창업 분야의 신예로 떠오르게 하였다. 그는 문화창작 회사 ‘드림시티’를 위하여 다중 IP를 갖춘 산업체인 생태계를 구축하여 현재 ‘드림 캐슬’ 사의 안정적인 성공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는 과거 창업자 양성 교실에서 교육자로도 활약하며 창업 및 투자 과목을 강의한 바 있다. 현재에도 기업 관리, 저작권, 창의역량 등의 커리큘럼을 운영하고 있으며, 계열사 ‘Magic bean VC’에서는 문화창작 방면의 우수한 창업 아이템을 발굴하고, 문화 방면 창업자 인터뷰 프로그램인 '도 상담(朝上谈)'을 진행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경력은 청화대 경제관리대학의 비즈니스 사례에 기록된 바 있다. 그렇다면, 그의 창업 비결은 무엇일까? 어떤 특성이 그를 문화 창작 분야에서 빛 날수 있게 했을까?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시도하며 기꺼이 상황을 책임지고 인내하는 것, 이것이 위런궈의 대답이다.
"창업이 아니라면, 전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요?”
위런궈에게 창업은 필연이자 꼭 걸어가야 할 길이었다. 그는 부친의 피를 이어받아 창업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의 선조들은 랴오닝성의 작은 도시에 정착하여 살았다. 그의 아버지는 스무 살 때부터 흑룡강성 북쪽 지대의 황무지를 떠돌아다녔다. 부친은 다싱안링 산맥과 내몽골을 떠돌아다니며 목공, 수레 공일 등을 하였다. 그는 매년 설마다 당신의 어깨에 식량 한 자루를 짊어지고 집을 찾았는데 이것이 최고의 설맞이 풍경이었다. 그리고 1977년, 위런궈가 태어났다.
당시 위런궈의 부친은 기계공장의 엔지니어였고 그의 월급은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을 만큼 한 가정의 생활비는 버는 수준이었다. 80년대 초반 개혁 물결이 전국을 휩쓸었고, 부친은 엔지니어 일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 창업을 시작하였다. 부친은 집 가운데 뜰에 양계장을 지었다. 위런궈에겐 양계장의 냄새, 아버지와 닭을 사러 가던 날, 어머니와 시장에 달걀을 팔러 다녔던 날 등이 그의 유년 시절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아있다. 당시 그의 부친은 현에서 양계 전문 농가의 모범 노동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어느 날, 위런궈는 아버지에게 왜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닭을 기르냐고 물었다. 부친의 대답은 심플했다. 그는 매년 닭을 기르는 수입이 있기 때문이라며, 한 달에 2000여원을 벌 수 있다면 한 가족이 더 잘 살 수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셨다. 1984년은 중국 현대 상업사의 원년이자 개혁개방 이래 전국적인 창업 열풍이 절정을 이룬 해이기도 하다. 부친은 닭을 길러 번 돈으로 기계식 가공 공장을 차렸다. 자연스럽게, 위런궈의 청소년기는 공장의 발전과 더불어 성장했다. 당시에 아직 어렸던 그는 창업이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하고 그저 '아버지가 자주 출장을 가신다'고만 생각했다. 이러한 가정에서 자란 위런궈에게서는 창업에 대한 그의 속성이 곧잘 드러났었다고 한다. 그가 '창업'에 대해 아직 개념이 없는 사이에도 이런 특질은 조금씩 나타났다.
1996년 여름, 위런궈는 칭화대학 물리학과에 입학하였다. 당시의 청년 세대는 인터넷 보급이라는 신 문물에 첫 충격을 받은 세대이기도 하다. 기회를 포착한 대학생들은 무리를 지어 우후죽순 창업을 시작했고 창업 스타들도 곧잘 탄생했다. 당시 많은 학생들은 웹사이트를 제작하거나 액정, 디스플레이 장치 연구들 등 다방면의 관련 창업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재학 시절엔 가정교사와 더불어 인터넷 사이트를 제작하는 것이 대학생들 사이의 가장 흔한 아르바이트였다. 하지만 위런궈와 그의 룸메이트는 당시 한 가지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려냈다.
그들은 함께 돈을 모아 ‘레이저’ 프린터 한 대를 샀고, 소규모로 학생 서비스를 시작했다. 그들은 "310 Print Club"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장당 1원에 프린트 서비스를 차렸다. 그리고 이것은 그야말로 "대박"이 터졌다. 다른 인쇄점에서는 기본적으로 ‘잉크젯’ 프린터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잉크젯 프린터의 출력 가는 2원에 1장이었다. 경쟁력 있는 사업이었던 것이다. 일정 시간 동안 이 작은 사업을 경험하며 그들은 점차 '장사’ 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고 그들의 머릿속엔 비용과 이익에 대한 개념이 자리 잡았다.
그때의 작은 인쇄실엔 젊은 대학생들 특유의 창업 정서가 가득했다. 위런궈와 같은 기숙사 동기 6명 중 4명이 현재 모두 창업가가 되었다. 위런궈는 본과를 졸업한 후, 전신 정보 시스템 방면에서 4년 동안 근무했고 2004년, 그는 다시 칭화대로 돌아와 MBA 과정에 입학한다. 졸업 과제의 연구방향은 창업 그리고 벤처 투자였다. 그는 졸업 후 투자사인 ‘기원 자본’ 사에 입사하여 매년 수백 명의 창업자들을 만났다. 비즈니스 계획, 직무 조사, 업계 연구, 참여 기업 관리 이 모든 과정을 경험하며 그는 마음 깊은 곳에서 고갤 드는 창업 열망을 억누를 수 없었다.
"나는 본디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일하는 동안만 나 자신을 천천히 그리고 깊게 인식할 수 있어요".
벤처 투자회사에서의 귀중한 경험이 된 4년 후, 위런궈는 직접 회사를 차리기로 결심한다.
"아버지 세대의 창업은 더 나은 삶을 위한 것이었어요. 더 이상 굶주리지 않기 위해, 그야말로 생계를 도모하는 차원에서 였죠. 하지만 오늘날 창업 환경은 더욱 좋아지고 있어요. 창업에 대한 이해에 있어 우리와 우리 위 세대와는 다소 생각이 다릅니다.”
그는 70년 대생들에게 '이상주의' 적인 잠재의식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이상에 대해 말하길, '위대한 한 기업을 이룩하여 사회에 더 큰 이로움을 가져다주는 것"이라 말하였다.
그는 시종일관 그 자신이 창업가로서의 삶을 사는 것을 정해진 운명처럼 묘사했다.
그는 "저는 창업을 위해 태어났습니다."라고 말했다.
'중국 문화계 리더 인터뷰(2020)'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애니메이션 뤄샤오헤이전기 제작자 쉬량 인터뷰 (2) | 2025.03.21 |
---|---|
중국 최대 디지털 출판그룹 COL(中文在线) 대표 동즈레이 인터뷰 (6) | 2025.03.20 |